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였던 미국의 무하마드 알리(74)가 6월4일 파킨슨병으로 30여년 투병 끝에 별세했다. 그의 고향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10일 거행된 장례식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조사를 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큰 딸의 고교 졸업식으로 참석하진 못했지만 조사를 대독케 했다. 알리의 운구행렬이 지나는 거리엔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알리는 권투사상 유례없이 뛰어난 복서였다. 그는 1981년 은퇴할 때까지 헤비급 복서로서 56승(37KO승) 5패의 전적을 남겼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8세 나이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의 고교 성적은 고작 –D 였다. 그는 헤비급 프로로 전향해 1964년 고릴라처럼 육중하고 펀치가 강한 소니 리스턴을 7라운드 TKO(기술상 녹아웃)로 이겼다. 그는 경기에 앞서 리스턴에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장담했다.

알리는 키가 크고 팔이 긴 편이지만 헤비급 복서로선 몸집이 육중하지 못하고 얇다. 펀치력도 강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리스턴을 비롯 조지 포먼, 레온 스핑크스 등을 시원스레 꺾었다. 승리 비결은 전통적인 복싱을 벗어나 알리만의 독특한 기술을 구사한 데 있다.

복싱 교본은 “복싱 글러브를 아래로 내리지 말라” “턱을 쳐들지 말라” “상대의 펀치를 피하기 위해 상체를 곧게 뒤로 젖히지 말라” “움쩍 할 수 없도록 링 코너로 몰리지 말라” 등이다. 나도 중학교 때 체육관에 나가 잠깐 복싱 기초를 훈련했을 때 사범님이 늘 강조하던 기본이다.

그러나 알리는 이 기본을 모두 파괴했다. 그는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는 기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그는 글로브를 내렸고 턱을 올렸다. 상대가 가까이 접근토록 했다. 그리고 헤비급 복서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푸트워크(발동작), 탭댄스, 기민성 등을 활용, 상대에게 왼손 잽, 오른 손 스트레이트, 후크 등을 퍼부었다. 그의 잽은 그를 정상으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이었다. 상대편은 알리의 빠른 탭댄스를 내려보는 순간 서너 차례 펀치를 얻어맞아야 했다.

알리는 번개같이 빠른 펀치로 대부분 상대편의 머리를 가격했다. 상대는 알리를 공격하기 위해 알리 몸쪽으로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알리의 머리 공격이 두려워 망설이다 결정타를 당하곤 했다. 세계복싱 챔피언을 여러 명 길러낸 나침 리차드슨은 알리의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복싱과 관련, “신이 그를 가르쳤다”고 말했다.

알리는 복싱만 파격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사회활동도 그랬다. 그는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의, 올림픽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다.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자기 이름도 캐시어스 클레이가 노예 이름이라며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 1967년 베트남 전쟁 징집을 거부하고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징집 거부 이유로 “베트콩은 나를 검둥이로 부르지도 않는데 내가 왜 (베트콩에게) 총을 쏴야 하느냐”고 했다.

그는 평화적인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1995년 평양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에 참가했을 때 북한 관리가 “북한이 도덕적으로 (미국 보다) 우월하고 우리가 원하면 미국과 일본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이 후레자식들(북한)을 증오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고 맞섰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그의 성마른 성품을 반영한 단면이었다.

알리는 링에선 잔혹하고 사나왔지만 불우 노인들 앞에선 자비스러웠다. 그는 1975년 12월 추운 겨울 뉴욕의 장애 노인들을 수용하던 양노원이 재정난으로 문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아침 일찍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15만달러(1억7000만 원)를 흔쾌히 내놓았다.

무하마드 알리.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였고 평화적인 흑인 운동가였으며 따뜻한 마음을 지닌 박애주의자였다. 멀리서나마 알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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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석 교수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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