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소일하실 계획이옵니까?”
“그동안 조정에서 하는 일 없이 녹봉만 축냈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밀렸던 공부나 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네. 조정에 남은 자들이 종사를 위해 분투해주리라 믿네. 자네는 조정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보배야. 더욱 정진하여 기울어가는 고려 사직을 위해 진충보국(盡忠報國)해주기 바라네.”
“선생님, 명심하겠사옵니다. 조정의 일을 하면서 힘들 때에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이제현이 몸을 일으키자 우탁도 따라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대문까지 나란히 걸었다.
“선생님, 자주 안부 서찰을 올리겠사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라옵니다.”
“익재, 잘 가게나. 또 볼 날이 있겠지.”
이제현은 밤이 이슥해서야 우탁의 집에서 나왔다. 훈훈한 바람이 술기운을 더하게 했는지 휘청할 만큼 취기가 돌았다. 우탁의 배웅을 뒤로 하고 나온 이제현의 흉금에는 어떤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역동 선생의 우국충절과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를 배우리라…….’
우탁의 집에서 수철동 이제현의 집까지는 10리 조금 모자라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장인 권부의 이야기가 다시금 이제현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우탁은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녀 ‘우탁설화’가 전해내려올 정도라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자, 계속 그러면 멸종을 시키겠다고 글로 써서 보내니 호랑이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오고 있네.”
이제현과 우탁은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어느덧 기울어 가는 고려 사직을 위해 흉금을 터놓고 시국을 논의하는 정신적인 사제지간이 되어 있었다. 이후 이제현은 자신에게 학문적인 기초를 가르쳐 준 권부, 성리학을 전수해 준 백이정, 그리고 선비의 추상같은 기개를 심어준 우탁, 이렇게 세 분을 인생에 있어서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따르게 된다.

26세에 서해도 안렴사를 제수 받아 선정(善政)을 펴다

1308년(충렬왕34) 겨울. 이제현은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가 바뀐 1309년에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종6품)에 발탁되었다. 1310년에는 선부산랑(選部散郞, 이조·예조·병조가 합친 관아의 정6품)으로 옮겼다. 1311년에는 다시 전교시승(典校侍丞, 서적을 관리하는 종5품)과 삼사판관(三司判官,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는 종5품)에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직무 수행에 대해 호평을 받았다.

1312년(충선왕4) 봄.
이제현은 26세에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안렴사(按廉使, 각 도의 으뜸 벼슬)를 제수받았다. 그가 부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정한 토호세력을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징치(懲治)한 것이다. 국가에 바쳐야 할 조세를 내지 않은 오만한 토호들이 그때까지 체납한 관곡을 거두어 들였으며, 이 관곡 중 토호들이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착취한 것은 모두 원주인을 찾아 되돌려주었다.
다음은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이제현은 백성들을 구휼(救恤)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난해 서해도 지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났사옵니다. 그런데다 남자들은 부역으로 지쳐 있고 여자들은 빌린 쌀을 갚느라 지쳐 있으니 어떻게 살 수 있겠사옵니까? 청컨대 성지(城址,성터)를 수리하는 것 외에는 모든 역사(役事)를 다 금지하소서.”
이제현의 상소는 조정에서 받아들여졌고, 노역에 지친 백성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어 이제현은 청렴한 아전(衙前)을 충원하여 악취가 풍기는 부패한 정치를 맑게 했으며 옥사(獄事)를 엄정하게 판단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이 없도록 했다. 또한 부임하여 얼마 안 있어 고을에 큰 불이 났는데, 이제현은 관아의 양식을 모두 내어 이재민 구제에 정력을 기울인 동시에 굶주리기를 그들과 똑같이 하여 목민관으로서의 수범을 보였다.
안렴사로 제수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할 만큼 일년 중 제일 바쁜 망종(芒種)이 되었다.
관내 밭에서 보리를 베던 이제현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면서 이삭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풍년이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밭일을 해 왔으나 이렇게 잘 자라고 잘 여물기도 드문 일이었다. 일년 양식은 하고도 남을 것이요 어쩌면 이태 양식도 될 듯했다.
“휘이휘, 휘어 -.”
멀리서 농부들이 새떼를 쫓는 소리가 울려왔다.
이랑 저쪽 끝으로부터 마주 베어오던 아전(衙前)들이 마지막 몇 그루 앞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구 허리야.”
이제현은 남은 보리를 베어 옆에 놓고 낫 끝으로 흙덩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여보게들, ‘내 배가 부르니 종의 배고픔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 않은가? 농민의 아픔을 모르면서 어떻게 선정(善政)을 펼 수 있겠는가?”
새로 부임한 안렴사의 이 같은 솔선수범에 서해도 백성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본래부터 부유했던 농촌 지역이었던 만큼 반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 이제현은 부월(斧鉞)을 잡은 옛 사람의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안렴사 부임 6개월 후. 이제현은 개경에 있는 친구 박충좌에게 농민들의 참담한 삶의 현실을 담은 서찰을 보냈다.

보고 싶은 치암에게.
서해도 안렴사로 부임한 지도 어언 반년이 훌쩍 지났네. 그동안 지방관으로서 농민들의 생활을 소상하게 살피느라 부임 인사가 늦었네. 지난 몇 년 사이에 가난에 시달린 농민들은 무자비한 세금 징수와 지배자들의 압정 때문에 마침내 아이들까지 팔아버리게 되었다네. ‘백성을 괴롭히는 학정과 세금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는 공자의 말씀이 이곳에서 새삼스럽다네. 그동안 탐관오리들이 호의호식하며 주지육림에 둘러싸여 민생은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수탈했기 때문일세.
내 비록 미력하나마 이곳에서 지방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민의 유망(流亡), 국가 재정의 부족, 권세가의 토지 겸병, 풍속의 문란, 쟁송의 불치(不治) 등 현실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 개선책을 조정에 상주하여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충보국(盡忠報國)하겠네. 그럼 건강히 잘 있게.
임자년 9월 말일 익재 씀.

이제현은 귀족 가문에서 성장했으면서도 일반 민중의 생활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더욱이 고려 지배체제의 잘못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지방관으로서의 업무 속에서도 일말의 모순과 회의를 느끼며 호소할 데 없는 분노를 안으로만 삭였다.
유능한 지방관이었던 이제현은 자신의 큰 포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백성 지금 탕임금 가뭄에 비를 바라니(斯民政要滋湯旱 사민정요자탕한),
저 정승 누가 부열의 비를 내릴 만한가(彼相誰堪作說霖 피상수감작설림).
‘가뭄에 목마른 백성을 위하여 단비를 내리게 할 사람이 누군가’를 묻는데, 성탕(成湯, 은나라를 세운 탕왕)과 부열(傅說, 성 쌓다가 발탁된 은나라의 재상)은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 노력하는 훌륭한 임금과 신하의 전형이다.
실제로 이제현은 목민관으로 재직하면서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성인인 부열의 ‘나무는 줄자와 먹에 따라 자르면 바르게 되고, 군주는 간언하는 말을 잘 듣고 행동하면 성인이 된다(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목종승즉정 후종간즉성)’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非知之難 行之惟難 비지지난 행지유난)’ 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조정은 이제현을 성균악정(成均樂正, 성균관에 두었던 음악 관계의 일을 보는 종4품)으로 불러들였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방관직을 수행하며 어려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핀 선정(善政)이 조정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까닭은 그가 우탁의 지부상소에 영향을 받아 참 선비의 도리를 실행하려는 ‘지부복궐(持斧伏闕)’의 풍도와 만고의 청백한 선비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서해도 고을 백성들은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제현의 목민관으로서의 덕행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 새겨 칭송하였다.
1313년(충선왕5) 가을. 이제현은 27세에 정4품 내부부령(內部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 술·장·꿀 같은 직조를 맡은 곳)을 제수받아 치수(銖, 가벼운 무게)와 척촌(尺寸, 자와 치)을 교정하였다. 이제현은 이것을 행하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로지 백성의 편에 서서 민생과 직결되는 재화의 출납 및 관리와 어려운 도량형 문제를 한 올 한 올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하였다.
“이제현은 재예(才藝)가 능해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라 이를 만하다.”
젊은 나이에 이러한 찬사를 듣는 것은 보통 벼슬아치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창조적 리더십을 갖춘 이제현의 관직생활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배운 원만한 처세와 스승 백이정·권부로부터 배운 학문과 성리학적 소양, 그리고 우탁으로부터 배운 과단성과 충의를 바탕으로 매사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일했다.

뜻이 곧은 선비는 애써 복을 구하지 않아도
하늘은 그 구하지 않는 자리로 나아가서 그 마음을 열어 준다.
음흉한 사람은 불행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하늘은 그 애쓰는 속으로 찾아가 그 넋을 빼앗는다.
보라, 하늘의 힘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인간의 지혜와 잔재주가 무슨 소용 있으랴.

‘뜻이 곧은 선비는 하늘이 길을 열어준다’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이 있다. 이제현은 대지대업(大志大業)을 이루기 위해 ‘뜻이 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로 관직 수행에 벼슬 운이 따라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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